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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하여 후환을 삼가노라.'징비록' 읽은 책들


서애 유성룡 선생이 임진왜란을 겪고 벼슬에서 물러나 반성하며 쓴 책.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재상이라는 위치에서 얻어지는 정보들과 도체찰사로써 역할인 민심 수습과 명나라와의 외교 줄다리기 등을 묘사하여 대단히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그책으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국보 132호) 책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일부터 묘사하고 있다.

1.이상한 일본의 사신, 그리고 통신사

<우리나라에서는 예전부터 일본 사신을 맞이할 때 지나는 군읍에서 지역 장정들을 소집하여 창을 들고 양쪽 길가에 늘어서 군대의 위엄을 보여주곤 했다. 야스히로(일본의 사신,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인동읍을 지날 때 창 든 자를 힐끗 보고는 '너희 나라 창은 아주 짧구나'라며 비웃었다.
상주에 이르러 목사 송응형이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기녀와 악공이 줄지어 있는 가운데 야스히로는 반백인 송응형의 모습을 보고 역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 늙은이는 여러 해 싸움터에 있었기에 머리털이 다 희어졌소이다. 목사께서는 음악소리와 기녀들 사이에 있으니 아무 근심도 없을텐데, 어쩌다가 머리가 희어졌소?" ...(중략)...
숙소로 돌아온 야스히로는 탄식하며 역관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그러하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하겠느냐?">
 -본문 中-

당시 국서를 쓰는 직책을 맡고 있었던 서애 선생은 통신사를 보내 양국의 사이가 벌어지게 하지 않을 것을 간하였고, 지중추부사 변협 등도 사신을 보내 회답하고 저들의 동정을 살피고 올것을 말하자, 조정에서는 첨지중추부사 황윤길과 사성 김성일, 전적 허성 등을 보낸다.(1590~1591) 통신사는 일본에서 그들의 태도가 무례한 점, 사신이 돌아가려 하였으나 답서가 늦어지는 점, 그 답서의 내용이 오만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점 등을 통해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그러나 함께 돌아온 두 사신의 말은 어긋나고 만다.

<부산에 도착한 황윤길은 사신 일행이 겪은 바를 기록한 글을 올리면서 곧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일본의 정황을 보고했다. 복명을 한 후 임금께서 불러들여 묻자 황윤길은 전과 마찬가지로 보고했다. 그런데 김성일은 '저는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며,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중략)...
내가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의 생각이 황윤길과 크게 다르니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김성일은 이렇게 답하였다.
"나 역시 왜놈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나라 안팎이 놀라고 의심할까 봐 그리 해명했을 따름입니다.">
-본문 中-


닥쳐올 우환이 중대하다면 마땅히 그 일을 조정에 올바로 보고하여 대비하게 하여야 마땅할 것이니, 혼란을 우려하여 그리 말하여 조정의 의견을 둘로 나뉘게 한 김성일의 태도는 그렇게 옳다고 할 수 없다. 평소에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그가 그 날 그리 이른 것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수고롭다 하더라도 전쟁의 위협을 대비함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일본을 얕잡아보아 일이 터져도 수습하리라 여겼던 것 같다.


2.안일한 전쟁 대비

그래도 일부 의견을 수용하여 전 조정에서는 일부 전쟁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나라는 평안함에 젖어 성을 쌓는 부역을 모두 번거롭게 여겼고 그나마 쌓은 성도 지세를 살리지 못해 훗날 화근이 된다. 그리고 왜적의 위세가 강해지자 선조는 장수를 추천해보라 하였고 이 때 서애 선생은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이순신은 이때 정읍 현감에서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니, 그나마 모든 대비 중에 가장 뛰어난 조치였다. 그리고 각기 읍마다 분할하여 병을 귀속시켜 대단위 병력이 침공했을때 속수무책인 제승방략 체제를 하나의 진관에 귀속시키는 선대의 체제를 복구시키려하나, 경상 감사 김수가 '시행한 지 오래되어 갑자기 바꿀수 없다'는 의견을 내어 그 논의는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니 이것은 나중에 뼈아픈 실책이 되었다.

<전쟁의 조짐이 점점 분명해지자 선조는 여러면에서 군비를 강화하고 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해자를 파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여년이나 평화를 누렸으며 특히 경상도 등 남부지방은 그 이전 수백년 전부터 전란을 입은 경험이 없었기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이 선조의 명을 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비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서두르자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탄핵까지 받을 뻔 하였다.>

-위키백과 '임진왜란'-

<복명하고 나서 4월 1일 신립이 집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 내가 물었다.
"조만간 변이 생기면 공이 마땅히 책임을 맡아야 할 것이오. 공이 가늠하기에 적을 잘 작을 만하겠소?"
신립이 대단히 가볍게 여기며 걱정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가 짧은 병기만을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긴 창을 함께 가지고 있소이다.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오."
신립이 황급히 말했다.
"조총이 있다 한들 어떻게 다 맞히겠습니까?">
-본문 中-

당시 조정에서 가장 신뢰하였던 장수인 신립은 비록 날래고 용맹하였을지 모르나, 지략이 모자라고 성품이 사나웠으니 대사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훗날 신립은 탄금대에서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게 산화하고 만다.


3.전쟁의 발발, 계속되는 패배


<이날(4월 13일), 왜선이 쓰시마로부터 바다를 뒤덮으며 몰려왔다. 멀리서 바라보니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부산포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이를 보고 몹시 놀라 성으로 돌아왔다. 왜병이 잇다라 상륙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본문 中-

여하간 조선은 전쟁의 준비가 미흡하였고 일본은 전쟁을 해야만하는 상황에서 철저히 준비한 것이니, 개전 초기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단련된 일본의 15만 대군은 파죽지세로 부산을 함락시키고 잇따라 밀양 대구를 거쳐 조령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놀란 조정은 이일과 신립을 출전시킨다. 그러나 신립은 인망이 없었고 싸움에 나가는 장수의 몸가짐도 바르지 못했다.

<...신립이 궐 밖으로 나가 직접 다니며 무사를 모집하였지만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신립이 내게 왔다가 계단과 뜰사이에 지원자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매우 성난 얼굴로 김 판서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대감께서는 이 군사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어찌 소인 같은 사람이 부사가 되어 가기를 바라겠습니까?"
...(중략)...
하직하고 나온 신립은 빈청에 들러 대신들을 만났다. 계단을 내려 갈 즈음 사모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서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그런데 용인에 도착한 신립이 올린 장계에 서명조차 되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마음이 산란하지 않은가 의심하였다.>
-본문 中-

한편 제승방략에 따라 지방수령들은 자기 군대를 이끌고 대구로 달려왔다. 그러나 지휘관인 순변사가 몇일이 지나도 오지 않고, 큰 비가 내려 의장이 젖고, 군량이 떨어져가자 탈영이 잇따른다. 마침내 이일이 문경에 당도하자 이미 전쟁을 감당할 병력이 아니었다. 또한 개령현 사람 하나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려왔음에도 민심을 미혹한다하여 목을 베어 버린다. 이런 군대가 어찌 이길까? 그때 적은 이미 20리 떨어진 장천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윽고 이일은 패하고 신립이 있는 충주로 달려간다. 그러나 신립은 열세인 병력임에도 지형의 이를 취하지 않고 험한 산지인 조령이 아닌 물러날 곳이 없는 탄금대에 진을 쳤고 패하여 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충주에 들어선 신립은 충청도 군영의 군사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군사가 8000여 명이었다. 신립은 조령을 지키려 하였으나 이일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하여 충주로 돌아왔고 이일과 변기 등도 충주로 불러들였다. 조령처럼 헌한 곳을 버려둔 채 지키지 않았고, 명령체계는 복잡하고 기강이 없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적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중략)...
후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적을 추격하는 길에 조령을 지나다가 '이처럼 험한데 장수가 지킬 줄 몰랐으니 신립 총병도 지모가 없는 이로다'라며 탄식했다. 신립이 비록 날렵하고 용맹스러워 당시 명망을 얻고 있었지만 책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옛사람이 '장수가 병법을 모르면 제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다'고 하였다. 이제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훗날의 경계가 될 만하기에 모두 기록한다.>
-본문 中-

이윽고 신립의 패배를 들은 조정은 권협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주까지 이어질 몽진의 길을 나선다. 전국 각지에서는 패배의 소식이 끊이질 않고 많은 장수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장비를 버리고 옷을 바꿔입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 어이없는 일도 발생한다.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적과 싸워 6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왜란 이후 첫 승리였으나, 신각이 김명원의 부관임에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하여 참수시킨다. 신각은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연안 부사였을 때 성을 수축하고 해자를 팠으며 군장비를 많이 갖추는 등 전쟁 대비에 힘을 써 훗날 이정암이 연안을 수비하는데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으니 큰 인물이 아깝게 죽은 것이다. 평양에서 선조는 명에 구원을 청하고, 얼마 뒤 평양성도 함락된다. 얼마 뒤에 명의 조승훈 총병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탈환하려하나 유격대장 사유는 전사하고 패퇴한다.


3.조선의 반격, 명의 개입

<...그에 앞서 고니시 유키나카는 평양에 들어온 다음 이런 글을 보내왔다.
"일본 해군 10만여 명이 또 서해에서 오고 있으니 대왕의 어가가 이제 어디로 가실지 모르겠군요."
원래 적들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올라오려고 했다. 이 한번의 전투에 힘입어 마침내 적의 한 팔을 잘라낸 셈이었다. 고니시 유니나카가 평양은 얻었어도 고립된 형편이라 전진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라가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 中-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시키고 평양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조선 또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의 보급, 통신망을 끊고 밤마다 일본군을 괴롭혔다. 대표적인 이들은 전라도의 전 판결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 전 영해부사 최경회가 있었고 경상도에는 현풍의 곽재우, 고령의 전 좌랑 김면, 합천의 전 장령 정인홍, 전 한림 김해, 교서관 정자 유종개, 초계의 이대조, 군위교생 장사진 등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음력 5월 사천해전, 6월 당포해전, 7월 한산도 대첩까지 싸우는 족족 승승장구하며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병력이나 군량, 무기 등의 수송에 큰 곤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을 정헌대부로 올려주고 원균과 이억기는 가선대부로 올렸다.

또 명에서 이여송 제독이 참전하여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수복한다. 그러나 이후 명은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에게 크게 패한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지 않고 심유경을 통해 일본과의 강화를 꾀하였고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지리한 휴접 협상에 나서게 된다.

그동안 조선은 의병을 관군에 편입시키고 군사 제도를 개편하였고, 일본은 남부로 물러가 왜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동안 고니시 유키나카의 책략과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하옥되는 일이 발생한다. 고니시 유키나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죽일 기회라며 거짓 정보를 김응서를 통해 조정에 흘렸다.

<해평군 유근수는 특히 날뛰어 놓칠수 없는 기회라고 여러 차례 아뢰고 계속해서 이순신에게 진격하라고 재촉했다. 이순신은 적의 속임수일지 몰라 몇일이나 머뭇거렸다.
...(중략)...
이순신은 옥에 갇혔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죄를 논하라 명령하셨다. 그때 판중추부사 정탁이 간했다.
"이순신은 명장이니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군사상의 계책은 다른 이가 그 득실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진격하지 않은 것은 생각없이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셔서 후에 세울 공을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한 다음 사형을 감하고 삭탈관직하여 군대에 일반 군사로 보충해 넣었다.>
-본문 中-


4.정유재란, 전란의 끝

이순신이 실각하자 일본군은 남부4도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곽재우, 김시민에게 대패하였던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크게 무찔렀다. 원균, 이억기는 이때 전사한다. 그 여파로 남해, 순천이 차례로 함락되었고 전라도는 일본군에게 유린되고 만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내지만 이순신이 힘들게 만들어놓은 조선 수군은 배설이 겨우 도망치며 챙긴 10여척의 배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이순신은 다시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병선을 거두었으니 겨우 10여 척이었다. 한편 연해에는 배를 타고 피란한 자들이 셀 수 없었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순신이 길을 나누어 보내 소집하자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순신은 이들을 군 후방에 배치해 병사들을 돕도록 하였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에 능숙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그는 2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서해 쪽으로 가려다 벽파정 아래에서 이순신과 맞부딪쳤다. 12척 배에 대포를 싣고 진격한 이순신은 조류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순류가 이르자 공격했다. 적은 패주했고 군의 위엄이 크게 진작했다.>
-본문 中-

이후 일본군은 군량과 병력부족에 시달리며 큰 전공을 거두지 못하고 남부에서 왜성을 지키며 농성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쫒아 크게 승리하였으나 직접 활을 쏘며 장병들을 독려하다가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했으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기나긴 임진왜란은 막을 내린다.


<남해의 경계까지 적을 추격하였는데 이순신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직접 나서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맞고 말았다.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부하들이 그를 좌우에서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모셨다. 이순신이 말했다.
"전투가 시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
그리고는 숨을 거두었다. 평소 담력과 국량이 큰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이순신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면서 전투를 지휘하고 독려했다. 군중에서는 몰랐다. 그때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당했다. 이완이 멀리서 보고 자기 군사를 지휘하여 구했다. 적이 흩어져 떠나자 진린은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준 것에 감사했다가 비로소 그가 죽은 것을 알았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땅바닥에 자기 몸을 던지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나를 구하러 온 줄로 알았는데, 어째서 돌아가셨단 말이오?"
그는 가슴을 두드리며 크게 통곡하였다. 이를 본 모든 군사들이 통곡을 하자 그 소리에 바다가 진동하였다.
...(중략)...
"공께서 마침내 우리를 살리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백성들이 영구를 붙들고 울며 도로를 메워 수레가 나갈 수 없었다.>
-본문 中-


5.서애 유성룡 선생의 교훈

임진왜란은 전쟁 이전부터 조선의 실책이 연발하였고 개전 초기에도 한심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 그야말로 조선 최악의 전란이라 할 만했다. 다행히 의기있는 백성들과 충신들, 특히 성웅 이순신의 활약으로 승리 하였으나 전란으로 인한 상처는 씻을 길이 없었다.

조선은 사신이 병이 났다하여 사신의 왕래를 줄여 잘못된 처신으로 일본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마침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통신사를 보내 정탐을 하여놓고도 정세를 올바로 읽지 못하고 조정이 서로 나뉘어 분분하게 되었으니 정치가 어지러웠고, 대비를 할 때는 확실히 하지않아 후환을 초래하였다.  싸우게 되었을 때 군대의 기강이 없거나 인물을 잘못 다루어 연패를 거듭하고 마침내 몽진까지 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그리하여 조선 최고의 재상 중 하나로 꼽히는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전란의 아픔을 후세에 남기고자 징비록을 남겼다.

임진년에는 국운이 다하지 않아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했으나, 그 뒤에 병자년에 일어난 호란 때는 두달 만에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의 치욕을 당하였고 마침내 훗날 경술년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니 민초는 30년이 넘게 일제의 치하에 신음하였다. 서애 선생이 이런 값진 책을 남겼으되 그 교훈이 후세에 온전히 전하지 못한 탓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리하여 시대상황이 달라도 매번 교훈을 준다. 우리는 오늘날 이 책을 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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